기록들/journal

유한성이 주는 의미에 대해

detail_jy 2023. 9. 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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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그 외의 것들은 필터링한다. 눈은 뜨고 있지만 진짜 보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시각 정보는 뇌에 도달하지 않는다. 눈은 볼 수 있는 능력이 되지만 뇌가 정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많은 것들을 놓치기도 한다.

근심걱정에 휩싸여 있어, 지하철 창가로 보이는 구름 뜬 하늘을 감상하지 못하고,
업무 스트레스에 치여 옆자리에 있는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어도 인지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주변 정보들을 거의 놓치고 산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세상이 보여주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다 담아내고 그것을 인지하고 정보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까진 없다.

우리 주변에 항상 당연하게 있는 사물들이나 환경은 주의깊게 들여다 보기 쉽지 않다. 늘 지나가는 길의 나무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매일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앞 가게의 간판에는 뭐라고 쓰여있는지. 일상의 풍경은 너무 당연하고 늘 똑같이 느껴져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늘 똑같다고 생각했던 사물을 제대로 아무런 판단 없이 바라보고 주의를 기울여보면 그동안은 쉽게 지나쳤던 디테일과 작은 변화나 움직임 그리고 어떤 원리나 구성들이 보이게 된다고 한다.

아무 의미 없던 사물에 내재된 패턴이 보이고 그 패턴은 코드로 바뀌며 의미가 생긴다. 삶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될 때, 내 주변에 당연하다고 여긴 사물들, 사람들, 공간을 관찰해보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흥미로워질 수도 있다. 이 생각들은 James Elkins 의 ’How to Use Your Eyes'라는 책의 서문에 담긴 내용을 읽으며 정리했다.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지나치게되는 평범한 사물의 예시로 ‘풀 (grass)'에 대해 이야기 한다. 풀밭 위에 앉고 잡초를 뽑아본 기억은 있지만 풀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 본적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풀’ 따위에 신경쓰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들로 가득차 있어 풀을 주의깊게 보는 건 나중에 나이들어서 은퇴후 시간이 더 많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시간이 충분할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산수로 삶이 유한함에 대해 설명했다.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 수명은 30,000일 가량된다. 30,000일 중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날들은  약 10,000일 정도이니, 풀을 바라볼 날들은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마흔 살을 이제 넘긴 저자로서는 그 10,000일 중 푸른 풀밭을 볼 수 있는 기회 중 절반은 보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30번의 여름을 더 맞이 할 것이고, 각 여름에는 60일 정도의 화창한 날씨가 있을 것이고 그 중 20일 정도만 야외활동을 한다고 치면 풀을 바라보고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기회는 약 600번이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삶과 기회들을 세어보면 삶의 유한성이 실질적으로 다가온다. 사소해보이는 것들도 유한하고 몇번 경험해보지 못하는 순간들이라고 여기게 되는 순간 소중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기꺼이 머물기로 한 순간과 현 상태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것은 영영 간직하지 못한 잃어버린 시간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머물러서 온전히 감각에 집중하고 그 순간에 집중하면 내 의식의 필터에 걸러지지 않는 수많은 것 중 그래도 조금이라도 간직할 수 있다.

마이클 애시크로프트 (Michael Ashcroft)는 그의 뉴스레터에서 ‘4000주’라는 책을 언급했다. 책의 저자 올리버 버크만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명백한 한계로 인해 한 생 동안 할 수 있는 일의 기회들이 매우 한정적이었다. 요즘은 너무나 많은 잠재성과 선택지와 갈 수 있는 길들이 있고 다양한 분야, 과목,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이 주어져 있어 어떻게 보면 현대인의 삶은 잠재력으로 가득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한들,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인간일 뿐이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인지는 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일생동안 할 수 있는 것들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물론 생산성에 따라 대부분의 평범한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취를 해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극소수이다. 그 사람들은 그런 수준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그만큼 자신의 무언가를 내주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없는 그 사실이 우리가 삶에서 내리는 선택들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선택지와 갈림길에서 우리가 결국 선택하고 헌신하기로 한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한계가 있을 때 사람은 더 창의적으로 사고하기도 한다.

한계가 존재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고 그럴 시간이 무한대로 있다면 우리가 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의미가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이게 아니어도 다른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인간이기에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유한성과 한계들에 대해 슬프게 생각할 게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을 섣불리 판단하고 지나치기 보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때 내가 그 순간을 대하는 마음이 바뀌는 지 보고, 마음이 바뀌어 갑자기 사소하다고 느꼈던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대상이 있다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고 헌신해보면 어떨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유한성이 있어 삶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러니 유한성과 한계를 오히려 환대하고 소중한 시간을 좀 더 의식적으로 보내야겠다.

무엇을 할지 너무 오랜 고민을 하기보단, 한 가지를 결정하고 그 것에 온마음을 쏟으면 의미를 가진 무언가가 된다. 의미를 먼저 찾으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다. 온 마음을 쏟아보기도 전에 의미가 생길 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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