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프랑스 자취 요리를 주제로 한 이재호 가정의학과 의사 작가님이 쓰신 책을 읽었다.
<모쪼록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 : 프랑스식 자취요리>
원래 요리 관련 책을 잘 읽진 않았는데, 의대생이 요리학교를 가게된 사연이 궁금해졌고
나와 비슷하게 어떤 한 분야에 온전히 속하지 않고 두가지 이상의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방황하던 스토리를 찾고 싶었다.
앉은 자리에서 거의 다 읽을 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요리 사진이나 이미지 한 장 없었지만, 읽는 내내 작가가 요리를 하며 느낀 소소한 행복과 정성이 그대로 전달되어 나까지 덩달아 요리와 관한 나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요리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못하지도 않는 애매한 상태인 것 같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집밥 메뉴로만 주로 하기 때문이다.
요리를 잘한다, 못한다를 판단하기엔 아직 경험치가 부족하다. 온전히 독립해서 가정의 식탁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도 아니기도 했고, 최근까진 회사에 다니면서 굳이 요리를 해먹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퇴사 후 쉬고 있는 요즘 요리에 다시 스멀스멀 관심이 생기게 되었는데, 프랑스식 자취 요리 이야기는 나의 흥미를 끌었다.
2.
돌이켜보면 나의 첫 요리는 대학교 2학년 때 기숙사에서 학점 미달로 쫓겨나 고모네서 1년간 신세를 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고모는 내게 살림의 A-Z를 다 알려주시려고 하셨고, 바쁘셔서 밥을 항상 챙겨줄 수는 없으니 직접 장봐서 요리를 해먹도록 손쉽게 해먹을 수 있는 음식 조리법들을 알려주셨다. 기초 재료를 다듬고, 기름으로 채소를 볶는 것부터 파스타, 카레 같은 소스 기반의 요리들도 혼자 해먹을 수 있는 정도의 아주 기초적인 것들을 그때 배운 것 같다.
그때 처음 살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대학생 때 나는 조금 유별났는데, 피부 트러블에 대한 공포증, 노파심으로 편의점식품이나 간편식을 전혀 먹지 않고
동물학대와 관련한 자극적인 영상을 보게되며 한동안 채식을 한다고 선언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밥을 먹을 기회는 줄어들었고, 그 시절 왠만한 곳에서 내가 선택할만한 메뉴들은 거의 없었다.
마침 고모네서 살면서 혼자 밥해먹는 것에 재미를 들려서 기숙사에 돌아가서도 나는 가끔씩 기숙사 식당이 아니라 학교에서 조금 벗어난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당근 양파 같은 것들을 사와 기숙사 취사실에서 채소를 손질하고 파스타 같은 것들을 해먹었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햇반이나 즉석식품을 돌리면서 기다리는 같은 기숙사 층 학생들의 시선을 견디며(?) 나는 내 고집대로 그렇게 대학생활을 보냈던 것 같다.
어떻게보면 그때 친구 사귀는 데에 미숙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나만의 피난처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을 찾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방학 때 부모님 집에 가서는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병아리콩을 으깨 만든 콩빵 디저트 메뉴까지 구워 먹을 정도로 뭘 해먹는데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요리라는 것을 업으로, 전문적으로 배워볼 생각까지는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인스타그램도 하지 않았을 시절이라 순전히 나의 만족으로 그때를 위한 끼니 해결만이 목적이었다. 누구에게도 자랑할 필요도 없고, 칭찬 받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게 좋아서 했다.
의류학과였던 나는 패션의 도시 파리에 대한 낭만을 품고 2학년~3학년 쯤 1년간 프랑스어 수업을 수강했다.
기초 프랑스어는 곧잘 따라갔고 성적도 잘 받았지만 '시사 프랑스어'까지 욕심을 부리게 되었고, 고난이도의 프랑스어 벽에 부딪혔고, 금새 싫증을 느껴 그 이후로 프랑스어를 다시 하지 않았다.
그때 즈음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교에서 진행한 프랑스어캠프를 신청했는데, 그때 했던 프랑스 디저트 만들기 체험을 통해 베이킹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서래마을 오뗄두스에서 머랭을 만들었었는데, 그때 처음 내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를 진지하게 배워보고 싶어했지만 끝내 도전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의 갈팡질팡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진로고민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3.
그 후 나는 취업을 했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요리와 점점 멀어졌다.
요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다가, 넷플릭스에서 한참 유행하던 해외 미식 시리즈인 <쉐프의 테이블>을 보면서 다시 요리에 강력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때는 취미로 일본어를 마침 배우고 있었는데, 퇴사하고 일본으로 제과제빵 유학을 가는 상상도 잠시했었다. 그때 매우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던 회사에 매여 이 회사를 꿋꿋히 다니는 것 외에 나에게 그 어떤 도전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제한적 사고 방식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제과제빵 유학이라는 갈망도 다시 내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게 됐다.
아마 그 이후로 실제로 요리를 일상생활에서 도전하거나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요리 유학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4.
국내에서도 유명한지 모르겠지만 해외 쪽에선 선풍적으로 인기를 끈 미국드라마 '더베어 (The Bear)'를 보면서
레스토랑업이라는 치열하고, 거칠고 힘들지만 겉으로는 아주 매혹적인 세계를 인간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 흑백요리사 프로그램이 한창 유행하고 있을 때 나는 더베어를 봤다.
(흑백요리사도 언젠간 보고 싶은데, 요리 뽐뿌 올 것 같아 일부러 안봤다)
더 베어는 요식업을 소재로 한 휴먼 드라마이다. 문제 많은 가족이 남겨둔 시카고의 한 골목의 지저분한 햄버거 조인트를 파인다이닝 쉐프 경력이 있는 막내가 일으켜 세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더베어를 보다보면 요식업 종사는 고통과 좌절, 사고, 정신없음의 연속인 것처럼 그려진다.
주인공인 쉐프는 자신의 아픔과 결핍에서 벗어나고 싶어 요리에 미친듯이 몰입해서 업계에서 인정받는 경지에 오르기는 하지만
뿌듯함이나 성취감은 잠시일 뿐, 그의 그림자는 쉽게 그를 떠나지 못한다.
이 드라마를 보며 느낀 것은 어떤 분야에서 특출난 재능을 갈고 닦고, 인정받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 개인의 재능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특출난 개인이어도, 타인의 지지 없이 진정한 행복에 다다를 수 없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쉐프는 거의 천재적으로 묘사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굴러가진 않고 계속 사고는 터지고, 주방 직원들과의 끊임 없는 투닥거림 속에서 선을 지키며 통제하려하는 모습이 보인다. 결국 타인을 향한 따듯한 마음과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말로는 싸워대고 비판하고 욕하지만 결국 옆에 있는 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쌓인 끈끈한 정, 동료애, 연대감이 식당을 굴러가게 해준다.
결국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것은 요리뿐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잘하고 싶다면
내 능력만 쌓고 내 재능만을 위해 모든 리소스와 에너지를 다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는지, 나는 어떤 동료인지 돌아봐야 한다.
실제 내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결국 팀워크와 좋은 사람들을 통해 내 역할이 빛이 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항상 겸손하고, 즐거운 동료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요즘 시대에는 빠른 기술발전으로 개인의 재능의 결핍에 대해 강조한다. 무엇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하려고, 강의를 사게 하려고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의 '클래스' 전성시대인 것 같다.
능력 키우기, 대체불가한 사람되기에 너무 치우치다보면,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좋은 동료가 되기,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는 것은 덜 신경쓰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내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하드스킬을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소프트스킬 쌓기 인 것 같다.
나의 경우에도 소프트스킬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다.
5.
책을 읽고난 후 프랑스 요리학교가 너무 궁금해졌다.
퇴사후 쉬고 있는 김에 요리를 배우러 갈까 잠시 상상해보았다.
2년은 해야겠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어서 추진 가능성이 매우 커졌고, 약 하루 이틀은 파리의 요리학교 주방에서 재료 손질을 하는 상상을 하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도 이 때 뿐인 감정이란 것을. 단순히 무엇을 한다고, 어떤 수업을 듣거나 과정을 듣는다고 무엇이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먼저 내가 되고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매일 매일 내가 하는 것이 그것과 일치하는지 ?
좋은 부분만 상상하며 그 곳에 가면 하게되는 상상만 하고 시도했다가는 실망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요리를 하고 싶다면,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요리를 작게라도 시도하고, 본질적으로 요리에 대한 내 감각을 느끼고,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은지 자문해봐야 한다.
당근 껍질을 벗기고 흙묻은 파를 씻어낼때,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즉흥적인 감정이 서서히 사라져갈 수도 있다.
모든 과정을 다 즐겨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된 과정과 지루함, 반복 등은 어떤 일에든지 필수이다.
하다보면 그것까지 좋아질 수도 있다. 처음부터 좋진 않지만 오래 버티다 보면 그 반복과 지루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즐거움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떤 일이든 충분히 깊게 파고들고 충분히 오래 버티다 보면 그런 즐거움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요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고 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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